본인이 처음으로 접했던 사극은 KBS2에서 방영되었던 <한명회>였다. 당시 이덕화가 주인공 한명회 역으로 열연했는데, 드라마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의 역사' 만화책을 읽고 역사에 호기심이 많은 초등학생이었던 본인은 그 작품을 신기해하면서도 재미있게 시청했다. 이후에도 사극에 대한 애정은 지속되어 <장녹수>라든지 이영애와 김보성이 주연이었던 <서궁>, 벽초 홍명희의 원작소설을 드라마화한 <임꺽정>, 유동근의 카리스마있는 연기가 돋보였던 <용의 눈물>, <왕과 비>, <태조 왕건>, <허준>, <여인천하>, <대장금>까지 사극 매니아라 자부할 정도로 많은 사극을 즐겼다. 하지만 <대장금> 이후로는 흥미를 잃어 달리 관심이 가는 드라마가 없을 때 어쩌다 한 번 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 작년부터 보기 시작한 일본의 사극은 본인에게 잃었던 흥미를 다시금 갖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극과는 다르게 일본의 사극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1. 전통 자체로서의 사극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과 같이 보통 KBS에서 제작된 사극은 정통사극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왕 세종>이 KBS에서 몇 번째로 제작된 대하드라마인지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도 답은 알 수 없다.
이번엔 NHK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아츠히메>는 몇 번째 대하드라마일까. 답은 47번째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을 통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의 사극은 과거의 역사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 하나의 작품이 끝났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끝난 작품은 후속작에 전통이라는 이름의 배턴을 넘긴다. 1963년에 시작된 그 전통은 45년이 지난 올해에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매년 1월이 되면 새로운 작품이 시작되고 12월에 막을 내린다.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계속 반복된다. 연도별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적어도 매니아들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이 인정되는 것처럼, 작품이 전통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우리의 사극도 이제는 기록되고 또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2. 다양한 신분의 주인공
일본의 사극은 비교적 다양한 신분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현재 방영중인 <아츠히메>는 에도막부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부인이었던 아츠히메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아츠히메는 막부군과 존왕군의 유혈충돌을 막고 막부의 권력을 텐노에게 봉환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한다. 2007년작 <풍림화산>은 전국시대 다케다 신겐의 군사 야마모토 간스케가 주역이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책략과 함께 한 주인공이다보니 웅장하면서도 어두운 느낌이 감돈다.2006년작 <공명의 갈림길>은 입신양명이라는 목표를 가진 남편을 내조하는 부인 치요와 야마우치 카즈토요 부부의 이야기이다.
반면 최근 우리 사극의 주인공은 영웅적인 인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듯 하다. 주몽, 대무신왕,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대조영, 세종대왕, 이순신, 정조... 이들은 아랫 사람을 지휘하는 위치에 서서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한 인물들이다. 정조를 제외한 모두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거나 영토를 확장하기까지 했다. 우리 국민이 영웅적인 지도자를 갈망하는 상황을 반영해서인지는 몰라도, 우연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주인공의 신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작품은 달라도 분위기나 스토리가 흡사하다. 어쩌다 한 두번이면 모를까 매번 그 나물에 그 밥이면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황진이>라든지, 조선 후기의 화가를 주인공으로 한 <바람의 화원>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
최근 7년간 NHK 대하드라마의 주인공
3. 신선함과 실력을 조화시킨 캐스팅
왕건이 되었다가 장보고가 되었다가 대조영이 된 최수종. 주몽이 되었다가 또 그 손자인 대무신왕이 된 송일국. 어느새 이들은 사극 주연전문배우로 자리잡아버렸다. 그들이 처음 사극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는 매우 신선했다. 하지만 출연했던 작품이 성공을 거뒀다는 점, 주연으로 쓸만한 연기자를 찾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재차 주역을 맡게 되었고, 어느새 식상한 이미지로 바뀌고 말았다.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한 번 주연을 맡았던 배우가 다시 주연으로 출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과거 故 오가타 켄과 니시다 토시유키가 3차례, 와타나베 켄이 2차례 주연으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2000년을 끝으로 이런 경우는 사라졌다. 당대의 톱스타가 캐스팅되는 경우도 빈번하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중견배우가 주역을 맡는 사례도 많다.
도박인듯 보였던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김명민 카드가 대박을 터뜨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연예계에도 사극에서 잠재된 연기력을 분출시킬 배우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통해 캐릭터의 다양화와 더불어 사극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떨까.
4. 철저함과 배려가 느껴지는 사극
일본의 사극은 오프닝에 많은 배려를 한다. 출연진보다 작품에 도움을 준 이들을 우선시한다. 어느 지역의 방언을 지도한 이가 누구인지, 시대 고증에 참여한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밝힌다. 또한 늘 역할과 배우의 이름을 함께 표기하되, 주인공이라고 해서 얼굴도 띄워준다든지 하는 법은 없다. 게다가 처음 한 번 제작한 것을 그대로 써먹는 우리의 그것과는 달리 일본은 매회 오프닝이 변한다. 정확히 말하면 매회마다 자막이 바뀐다. 아무리 중요한 배역을 맡은 배우라도 그 회에 출연을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이름이 빠져버린다. 반면 단역으로 출연해도 대사가 있으면 당당히 출연진으로서 이름이 오르고, 심지어는 이미 죽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즉, 예전의 장면을 재탕하는)에 등장하는 배우의 이름도 자막에 나온다.
이는 시청자에게 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배려의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작품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항상 약속된 시각에 방송이 시작된다. 시간에 쫓겨 오프닝을 반쯤 내보내다가 곧장 시작해버리는 우리의 방송사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5. 유적지 홍보에도 앞장서는 사극
매회가 끝나면 간단하게 다음회의 예고를 내보낸 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유적지 홍보이다. 드라마와 관련된 유적지를 간단히 소개하고, 찾아가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가령 당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든지, 인물의 생가, 묘소나 위패를 봉안한 사찰 등이다.
그러는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시청자들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에 찾아갈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현장에서 역사를 느끼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있다. 또 하나는 지역 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온 관광객들이 지방의 유적지를 탐방하다보면 자연히 그 지역에서 각종 비용을 소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도시인들은 역사를 체험하며 비용을 지출하고, 지역인들은 수익을 얻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에도 <태조 왕건>을 촬영했던 경상북도 문경의 세트장이나 <대장금> 촬영지 같은 곳에 많은 관광객이 방문했던 적이 있다. 역사체험과 동시에 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주었던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전통이 있는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데다, 드라마의 종영과 동시에 인기가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제는 우리의 사극도 잊혀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자세히 소개해 역사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지역발전에도 앞장설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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